현대차그룹, 러시아서 여전한 선호도

중고시장서 3~4위, 병행수입도 활발

올해말 ‘바이백’ 발동시 빠른 재개 가능

가전·타이어 등도 현지선호도 높아

202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 신차 크레타가 양산되고 있다. [현대차 제공]
2021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 신차 크레타가 양산되고 있다. [현대차 제공]

[헤럴드경제=김성우·김민지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협상이 급물살을 타면서, 국내 기업들의 러시아와 인접국 시장 재진출에 대한 기대감도 커지고 있다.

인구 1억4380만명이라는 거대 소비시장을 가진 러시아는 우리 기업과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특히 높은 지역으로 꼽힌다.

8일 재계에 따르면 러시아 시장의 재개방으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을 것으로 기대되는 기업은 한국 자동차 수출의 맏형 역할을 하고 있는 현대자동차그룹이다.

전쟁 이후 서방의 경제제재로 현지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현대차그룹은 지난 2023년 말 러시아 공장을 매각하고, 현재는 시장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상태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 분석 기관인 오토스타트에 따르면 현지 중고차시장 거래량에서 기아는 34만9581대(3위), 현대차는 33만2167대(4위)로 높은 순위에 올라 있다. 현지 생산이 끊긴 이후에도 한국차에 대한 여전한 수요를 반영하는 대목이다.

신차시장에서도 현대차그룹에 대한 차량 수요가 여전히 많아서 개인 딜러들이 현대차·기아 차량을 병행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습이 시작된 지난 2022년 당시 한 해 동안 현대차그룹은 기아가 6만5691대, 현대차가 5만4017대의 차량을 각각 판매하며, 현지 판매량 순위에서 각각 2위와 3위에 오른 바 있다. 판매 1위가 소비에트연방시절부터 ‘국민카’로 불려온 러시아 기업 아브토바즈의 ‘LADA’(라다·17만4688대)였다.

현재는 중국산 차량 브랜드인 체리(CHERY)와 하발(HAVAL)이 러시아 시장에서 2~3위에 올라있지만, 판매가 재개될 경우 현대차그룹의 빠른 회복세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2023년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을 1만 루블(16만원) 현지 기업인 AGR그룹에 매각할 당시 2년 내 재매입 가능한 ‘바이백’ 조항을 넣은 것으로 전해졌다. 토요타와 폭스바겐 등이 바이백 조항 없이 생산시설을 매각한 것과 대비된다.

또한 AGR그룹의 현재 최고경영자(CEO)가 현대차 러시아법인에서 오랜시간 몸담아온 알렉세이 칼리체프 전 현대차 러시아법인 사업총괄이라는 점도 현대차그룹에 긍정적인 대목으로 꼽힌다. 종전 협상이 수월하게 마무리될 경우 올해안에 공장 재매입이 가능한 조건인 셈이다. 다만 아직 전쟁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만큼 현대차그룹 측은 이와 관련해 공식적인 움직임 없이 현지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 완성차 업계 관계자는 “AGR그룹은 현대차그룹 생산시설을 활용해 현대차 솔라리스 등을 생산하고, 기존에 판매된 차량을 유지 보수하는 등 역할을 담당해 왔다”라면서 “이 덕분에 (현대차그룹이) 러시아 시장에 다시 진출하게 될 경우 빠른 회복세를 보일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현대차 러시아공장의 가동 당시 사진 [현대차 제공]
현대차 러시아공장의 가동 당시 사진 [현대차 제공]

지난 2010년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당시 총리)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주 카멘카 지역에 자리잡은 현대자동차 러시아공장의 준공식에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에게 현대차 솔라리스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있다. [현대차 제공]
지난 2010년 블라디미르 푸틴(오른쪽) 러시아 대통령(당시 총리)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주 카멘카 지역에 자리잡은 현대자동차 러시아공장의 준공식에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명예회장에게 현대차 솔라리스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있다. [현대차 제공]

현대차그룹의 러시아 시장 재진출은 완성차 부품업계에도 희소식이 될 전망이다. 현대위아는 지난 2021년 러시아 현지에 엔진공장을 준공하고 사업을 시작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손실을 기록해 왔다.

업계에 따르면 현대위아가 현지 공장에서 최대 생산량을 가동할 경우 연간 생산할 수 있는 엔진은 24만대로 매출액은 약 6000억~7500억원, 영업이익은 약 300억~375억원에 달할 것으로 기대된다.

글로벌 타이어 브랜드들의 철수에도 현지 사업을 유지해 온 한국타이어에도 종전 소식은 희소식이 될 전망이다.

앞서 미쉐린과 브리짓스톤 등 글로벌 타이어브랜드가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할 당시, 한국타이어는 이탈리아 타이어 생산업체 피렐리와 함께 현지에서 사업을 진행해 왔다. 타이어업계 관계자는 “한국타이어는 현지에서 어려운 사업업황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면서 현지 소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줬다”면서 “서방 제재가 풀릴 경우 프리미엄 타이어 시장을 중심으로 상승세가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사업 재개 기회를 엿보던 국내 가전업계도 이번 협상 결과에 촉각을 기울이고 있다. 러시아 현지 매체에 따르면, 최근 삼성전자는 러시아 내 마케팅 활동을 전년 대비 30% 늘렸다. 종전 협상 기대감에 조금씩 러시아 시장 재진출 시동을 걸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전쟁 발발 전 삼성전자는 모스크바 서남쪽 칼루가 지역에, LG전자는 루자 지역에 가전 및 TV 생산공장을 각각 운영 중이었다. 그러나 2022년 2월 전쟁이 터지며 현재까지 공장 가동을 중단한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러시아 스마트폰과 가전 시장에서 1위 사업자였다. 지난 2021년 삼성전자의 러시아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35%였다. LG전자도 한때 냉장고와 세탁기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전쟁 후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2%로 폭락했다. 러시아 가전 시장에서 삼성과 LG의 빈자리는 중국, 튀르키예, 벨라루스의 중저가 가전업체들이 차지했다.

다만 두 업체 모두 현지 생산 기지를 매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러시아 시장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다. 종전 협상이 급물살을 타 전쟁이 끝나면 빠르게 현지 사업을 재개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현지에서 소비자들이 ‘한국산’하면 삼성과 LG를 먼저 떠올릴 정도로 우리 가전업체들은 현지에서 선호도가 높은 브랜드”라고 설명했다.

LG전자가 2021년 러시아에 오브제 컬렉션을 출시할 당시 전시장 [LG전자 제공]
LG전자가 2021년 러시아에 오브제 컬렉션을 출시할 당시 전시장 [LG전자 제공]

항공업계도 러시아 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러시아 시장은 지난 2019년 아시아나가 수익성을 이유로 철수할 정도로 여행수요가 큰 노선은 아니었다.

하지만 대한항공이 운항해 온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등의 노선은 상업적 수요가 많은 지역인만큼, 경제활동 재개와 함께 특수를 누릴 가능성이 점쳐진다.

또한 국내 저비용항공사(LCC)인 제주항공(2017년 운항시작)과 티웨이·에어부산(2018년 시작)이 운항해 온 블라디보스토크 노선도 운항 재개에 대한 기대감이 높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블라디보스토크는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인식이 많아 여행객들이 많이 찾을 수 있는 지리적인 여건을 가지고 있다”면서 “최근 강원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파라타항공(구 플라이강원)이 재운항을 준비하고 지방공항을 중심으로도 새로운 수요처 찾기 바람이 일고 있어, 블라디보스토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다만 경제계에서는 러시아 정치권과의 관계 재정립이 우리 기업들에게 꼭 필요한 선결과제로 지목한다.

러시아 주요 언론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외국기업의 시장 복귀 가능성에 대해 “전쟁 기간 이익을 얻은 러시아 기업이 경쟁력을 잃지 않도록 신중하게 접근할 것”이라면서 “국내 기업이 그동안 받았던 특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외 기업이 복귀할 때 그 기준과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 러시아의 산업통상부 장관이던 데니스 만투로프 러시아 제1 부총리도 “서방 기업의 복귀를 사례별로 엄격히 따져보고, 우리에게 도움이 될 기업과 방법을 논의해볼 것”이라면서 “일부 회사가 바이백 옵션을 계약에 포함시켰지만, 구체적인 조건에 대해서는 논의된 바 없다”라고 말했다.

제주항공 항공기 [제주항공 제공]
제주항공 항공기 [제주항공 제공]

zzz@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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